△ 현실은 소꿉장난과는 다르다. 진정한 자신에 대해 깨달아야만 병을 이길 수 있다. 사진(c)Dollarphotoclub_Klara Viskova
‘나’라는 틀이 깨어져야 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고집이 병을 부른다, 온 우주가 ‘나’란 사실부터 느껴라
꿈같은 날들, 어렸을 적에 또래끼리 소꿉장난을 해본 기억들이 아스라하게 있을 것이다. 어떤가. 떠오르는가. 깨진 기왓장으로 밥상을 삼고 사금파리 주워서 풀을 찧어 반찬을 놓고 모래로 밥을 짓고, 아버지 노릇도 해보고 엄마 노릇도 해보고 애기 노릇 등등도 하면서, 우는 양도 해보고, 으름장도 놔보고, 사정도 해보고, 다투어도 보고, 여러 노릇들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도 엄마가 부르면 언제라도 손 털고 집으로 들어가던 기억이 남았을 것이다.
▲ ‘깨달음’의 순간
지금의 삶은 어떤가. 어떤 놀이를 하고 어떤 배역을 맡아 하는가.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이상해지는가. 지금은 준엄한 현실이고 그때는 그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련한 추억들이었고 소꿉놀이일 뿐이었는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어렸을 때 소꿉놀이 시절에는 그 일들이 소꿉놀이인 것을 알고 소꿉놀이를 하였다는 것이고 나이든 지금은 이 일들이 소꿉놀이인 줄을 모르고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자기 배역이 너무 맘에 들어서인가. 혹 가다가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구십 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은 자기 삶에 만족을 못하고 이삼십 퍼센트의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배역에 진저리를 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각자는 자기의 현재 배역에서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지며 손을 떼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했던 배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배역을 한탄하고 불평한다. 그리고 이 배역에서도 미끄러져버릴까 봐 두려워한다. 이것은 자기가 우주의 주인이며 끝없는 대하소설의 각본을 쓰는 자라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까닭이다.
그리고 자기가 쓴 각본에 따라 배우로서도 경험해본다는 것을,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소꿉장난이라는 것을. 놀이를 수정해 가면서 스스로 각본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자기가 모른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 여름 밤의 꿈’은 언젠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꿈을 꾸게 되고, 어떤 배역이라도 벗을 때가 온다. 꿈을 꾸다가도 너무 악몽이거나 좋은 꿈은 반드시 깨어나게 되어 있다.
아니면 스스로 소꿉장난이라고 알아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 고집을 내려놓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하는 지금의 상태’는 너무나 물질적이고 고착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도저히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자신의 착각인 줄 모르고 고집한다.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말랑말랑한 ‘가능태’인가를 모른다.
중환자들은 자신이 큰 병에 걸렸다고, 나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고 스스로 굳게 완강한 믿음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다. 자신은 이 상황을 빠져나올 자신이 없다고, 자신은 저 인간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굳게 믿는 대로 된다.
특히 만성적인 가난이나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마음의 성향이 심하다. 이 ‘바꿀 수 없다.’ ‘안 된다.’는 그 고집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 고집으로 이익을 보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에고가 무언가 대단한 이익을 챙긴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에고’라는 게 비었음을, 실지로 없음을 알지 못함이다.
역으로 나는 나을 수 있어, 나는 용서할 수 있어,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나는 나았어. 나는 용서 했어’라는 프로그램이 바로 실행될 것이다.
이 상태를 벗어나려면 이 고착된 물질적 상태 이전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 이전의 상태는 말하자면 마음이다. 마음을 분석하자면 조금 복잡하지만 일단 간단히 알기 쉽게 나누면 생각이고 감정이고 오감일 뿐이다.
▲ 진정한 ‘나’란?
눈이 보지 못한다면 보이는 세상이 ‘나’에게서 사라지고, 귀가 듣지 못한다면 소리가 사라지고, 코가 냄새 맡지 못한다면 온갖 냄새가 사라지고 혀가 기능을 하지 못하면 맛이 사라질 것이다. 촉감이 없다면 신체가 사라질 것이다.
이 오감을 정리한 것이 생각이고 감정이다. 역으로 생각과 감정의 표현이 오감으로 나타나고 재현된다. 그러니 이 생각과 감정을 잘 다루는 것이 오감을 통해 물질적인 영역으로 현상되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생각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물질을 바꾸는 것도 마음에서 생겨남을 인지할 때 비로소 여러 가지 무지의 착각을 벗어난 소꿉장난의 룰과 의미를 깨치게 될 것이다.
‘나’라는 것은 물질적인 것으로 보더라도 철저히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 아닌 아버지의 정과 ‘나’ 아닌 어머니의 혈로 이루어져 어머니의 영양분과 보살핌으로 자라서 ‘나’ 아닌 공기로 숨 쉬어야 하고, ‘나’ 아닌 물을 마셔야 살 수 있고, ‘나’ 아닌 음식을 섭취해야 존재할 수 있고, ‘나’ 아닌 이의 도움을 받아야만 된다. 따져보니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실제로 ‘나’란 ‘나’는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라는 틀이 제대로 오지게 깨지는 것이 그야말로 깨침이다.
‘나’ 라고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온 우주가 ‘나’ 일 수 밖에 없다”라고 알아차려야 이 사실 같은 소꿉장난을 파하든가 즐기든가 할 수 있겠다.
결국은 부르는 이도 나이고 불려 들어가는 이도 나이다.
최락완 교수(사우스베일로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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