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의식을 감당할 수 있는 절대의식으로 내 안의 무의식을 정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Dollarphotoclub_Marek
무한 잠재의식을 의식화하면
인간의 능력발휘 및 자아실현도 가능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이라 부른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의 말이다. 이처럼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숙명론에 빠지는 듯이 보이는 의미심장한 과학 실험이 있다. 이른바 ‘리벳 실험’이다.
▲ 리벳 실험
1979년 벤자민 리벳(캘리포니아 대학)은 의지와 동작 사이의 두뇌 현상을 실험했다. 동작에 대한 의지(will)를 일으키는 시점과 운동중추가 운동명령을 하는 시점, 그리고 운동근육이 움직이는 시점을 측정한 것이다. 그 결과 손가락을 움직이는 동작 전에 이 행동에 대한 의지가 선행됐지만 그 의지 이전에 이미 뇌에서는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신호가 감지됐다.
결국 ‘내가 손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실상은 거짓인 것이다. 다만 그렇게 느껴질 뿐이고 실제 현상은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그 이전에 무엇인가에 의한 피동적인 결과를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결론이다.
이 실험을 통해 우리의 결정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며 자유의지가 별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결정과 뇌활동 사이에서 뇌활동은 수 백 밀리 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결정을 위한 준비활동을 한 것이란 반박이 제기됐다.
이후 논란을 종식시킬 연구가 발표됐다. 독일 막스프랑크 연구소의 뇌과학자인 하인즈 교수 연구팀은 리벳박사의 실험을 새롭게 해본 결과, 우리의 인식보다 뇌가 최대 10초 전에 결정을 내린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선행한다는 의미다. 일상에서 행위가 지난 후에 보통 겪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말았네’ 하는 경우다.
▲ 마음과 몸의 관계
자신의 운명을 지금의 에고가 흡족하다고 느낀다면 무의식이 의식화되거나 말거나 관계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에고가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에고가 되기를 바라겠는가. 지금의 이 주제 ‘의식과 무의식, 어떻게 다룰 것인가’조차 엄밀히 따지자면 현재의식의 욕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떻게든지 모든 의식을 관장하고 싶어 한다. 현재의식이 운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든 긍정적으로 바라보든 인간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육체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바란다. 인간의 삶에서 건강과 행복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마음과 몸의 관계는 아무리 무의식적이어도 마음에 있는 것이 몸으로 나타난다. 무의식에 있는 것을 정화하거나 교정함으로써 몸의 모든 부정적 반응과 질병이나 증상을 없앨 수 있다.
▲ 최면 기법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 중 강력한 것이 최면기법이다. 최면은 언어를 통해 무의식을 변화시킨다. 최면에는 자기암시를 통한 자기최면이 있고 타인에게 암시를 거는 타인 최면이 있다.
내담자는 최면가의 암시를 따라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치유한다. 최면에서 깨어났을 때 내담자의 문제는 사라지며 더 이상 그것으로부터 얽매이지도 않게 된다.
최면은 수천 년 전부터 이집트, 그리스, 중국, 인도 등 각 지역에서 유사한 것이 존재왔다. 고대 최면은 주술사, 종교 지도자 같은 사람들이 사용했다. 당시의 최면은 잠자는 것을 연상할 정도의 신비로운 분위기에서 치유가 일어난다고 생각했고, 일반인은 그 신비성으로 인해 쉽게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고대의 주술사의 형태가 샤머니즘적인 방법으로 활용되었지만,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고유 잠재능력이 발현돼 자연치유력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 최면의 역사에서 시작된 잠재의식을 다루는 방법이다. 내가 낫는다고 자신에게 암시를 걸게 되면 앓다가도 낫게 될 것이고, 우리가 분이 나서 망해버리겠다고 자신에게 암시를 걸게 되면 우리는 망하게 될 것이다.
▲ 절대의식
최근의 현대 심리학 등 정신과학계에서는 인간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무의식 즉 무한한 잠재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인간의 능력발휘 및 자아실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러 과학적인 실험으로 통해 제한적이나마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우리가 말하는 무의식이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원죄, 또는 업식에 근접한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타고난 성향’에 가깝지만 또한 습관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습관에는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이 있다. 현재의식이나 무의식은 기본적으로 분리와 변별을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온갖 사건과 만물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의식에 절대의식이란 것이 있다. 이 절대의식을 소위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라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을 이름하여 하느님이라 부르고, 불교에서는 ‘참나’ 또는 ‘진아’라고 부르고 있다.
무아라는 것은 변화의 실체인 의식과 무의식을 지칭한다. 표면의식은 무의식에 매번 휘둘리지만 ‘절대의식’은 무의식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의식이 ‘절대 의식’을 부르기만 한다면 무의식을 지배 할 수 있다. 이 작업을 소위 기도라고 하고 참선이라고 하고 명상이라고 한다. 이것이 내 안에 있는 ‘참나’를 다시 인식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들은 절대의식으로 하여금 마음(의식과 무의식)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지금의 표면의식이 절대의식을 자각하는 것이 관건이다. 결국은 온 우주가 내 안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고 내 안의 무의식을 정화하는 것이다.
최락완 교수(사우스베일로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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