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경》, 《상한론》, 《금궤요략》, 《온병학》 등 고전에 충실하면, 오히려 미국 환자들을 보는 데에 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미국 현지인들은 후세방보다 고방을 더욱 선호하는 경향
한의대에서 25년 정도 강의를 해오면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나는 미국의 한의사다’, 두 번째는 ‘고전으로 돌아가라’ 등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고 너무 당연하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이 두 가지를 실천한 사람은 조용하게 자신의 클리닉에서 내실을 기하면서 성공적으로 한의사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미국 한의사
2014년부터 오바마 케어가 시작됐다. 특히 가주에서는 한의치료가 정식 의료체계에 속하게 됐고 이전보다 많은 미국 환자들이 한의에 관심을 갖게 되는 등 좋은 환경이 마련됐다. 그럼에도 많은 한국 커뮤니티 한의사들이 영어권 환자보다는 한국어권 환자를 선호한다.
하지만 ‘미국 한의사’라면, 현지 영어권 환자들을 봐야 한다. 물론 미국 현지인 환자를 보는 게 쉽지는 않다. 영어를 습득해 미국인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간과하면 안 된다.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이민 온 사람보다 영어실력은 떨어져도, 연륜을 최대한 활용하면 진심을 통하게 할 수 있다.
아직 영어가 편하지 않다고 주저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현지인 환자를 대할 때 간단한 한의학 한자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하면 몰입도가 훨씬 더 강해진다.
예를 들어 정(精), 기(氣), 신(神) 등 글자를 보여주고 인체 생리를 설명한다든지, 감기나 알레르기에 자주 걸리는 사람들에게 ‘동불장정 충필병온(冬不藏精 春必病溫; 겨울에 정을 저장하지 않으면 봄에는 반드시 온병에 걸릴 것)’이란 말을 쓰거나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의외로 효과가 크다.
이 문구는 특히 겨울에 살을 빼려고 다이어트를 하거나 만성피로증후군 환자에게 설명할 때 유용하다.
‘온병’이란 현대적 의미로 감기, 알레르기 등을 말한다. 한의학에서는 인체에 정이 튼튼해야 기혈도 충분해지고 외감병사에 저항력이 생긴다. 겨울은 오행상 저장하는 계절이다. 겨울에 살을 뺀다든지 안 먹는 것은 천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정기와 함께 사기도 같이 성행하는 봄에 병이 생기기 쉬워진다고 설명하면 미국 현지인들도 한의사의 설명에 몰입도가 달라진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영어가 익숙해질 때까지 환자에게 한의학에 대해 설명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고전으로 돌아가라
《내경》, 《상한론》, 《금궤요략》, 《온병학》 등 고전으로 돌아가자. 그러려면 한자가 중요하다. 중국어가 모국어가 아니지만 한의학 교재를 써 잘 알려진 지오바니와 테드 캡첩(Ted Kaptchuk)은 한자로 된 책을 읽고 바로 해석이 가능할 정도다.
이들 모두 중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중국어 공부를 해서 한자를 보고 고전의학 서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테드 캡첩이 저술한 한의학 서적은 얼마 전까지 가주한의사위원회(CAB)의 공식 교과서로 채택돼 사용했으며, 지오바니의 한의 서적은 아직 공식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다.
같은 미국 한의사라도 한의학 고전을 직접 읽고 바로 해석해 강의할 수 있는 사람만이 더욱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많은 부분이 한자와 연관돼 있어 이들보다 훨씬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중국어 원서를 읽을 수 있다. 중국어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한자로 된 서적만 읽으면 된다.
고방을 공부하면 유리한 것이 또 있다. 침(鍼), 구(灸), 약(藥) 등 3대 치료 수단 중 미국에서 침구는 보편적이지만, 약은 아니다.
그러나 후세방보다 고방을 사용하면 미국 현지 환자들에게 훨씬 쉽게 다가갈 수 있다. 고방은 처방구성이 간단하고 끓였을 때 보리차 같은 경청한 기미의 탕약이지만, 후세방은 기미가 중후해 냄새도 강하고 소화에 장애가 생기기도 한다.
당연히 미국 현지인에게 후세방을 처방했을 때 저항이 더 크다. 또한 현지 환자들은 고방이 차의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복용을 더욱 선호하며, 효과 역시 고방이 훨씬 유리하다.
▲서두르지 말라
학생이나 면허를 취득한 지 얼마 안 되는 한의사와 이야기 하다 보면,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 한의학은 옛 것을 모방하고 현대적으로 해석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때문에 그 과정이 단축될 수도, 한정 없이 길어질 수도 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일본 고방 대가인 대총경절(大塚敬節)이 쓴 《한방의학》을 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이 분도 임상을 고방에 의거해 《상한론》과 《금궤요략》을 외우는 데서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그가 외운 조문에 의거, 해당 증상 환자에게 탕을 줘 보는 오랜 과정을 거쳐 결국 조문과 병증에 맞는 처방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장수시대다. 만학이어도 반세기는 임상할 정도로 살 수 있다. 때문에 작은 바람에 흔들리지 말고 비전을 갖고 묵묵히 한길을 가야 한다. 물론 원론적이고 답답한 말이다. 하지만 이를 참고 견뎌야 비로소 온전한 한의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한직 교수(사우스베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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