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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rch 28, 2024

최락완 교수의 한의철학 (18) 의식과 무의식Ⅰ

△ ‘나’는 객체이면서 주체이다. 결국 모든 근심과 걱정에 대한 의문과 해답은 ‘나’로부터 나온다. 사진© Dollarphotoclub_Abstract

 

의식과 무의식의 산물 ‘나’

‘나’부터 제대로 떳떳해져야 할 때

결핍감에서 벗어나 양심 따라 행동하면 떳떳

 

‘의식(意識)’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나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작용이다.

‘무의식(無意識)’은 ‘의식’ 밖에서 의식에 영향을 미치지만, 자유연상과 최면 등 특정조작을 하지 않는 한 의식화할 수 없는 심적 내용이다. 융(Jung, C. G.)은 개인의 무의식과 전 인류에 공통되는 집단무의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자신을 컨트롤한다지만 삶을 영위하는데 실제적으로는 현재의식이 무의식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감(五感)을 통해 들어온 신호를 사람의 뇌가 처리하는 속도는 초당 4,000억 비트의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중 2,000비트 정도가 뇌에서 인식하고 겨우 50비트 이하만 의식으로 알 수 있으며, 나머지는 무의식에 저장된다고 추정한다.

때문에 의식적으로 맑은 정신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지만 대부분 직관이나 습관을 뛰어넘지 못하기 마련이다. 정보량의 차이가 엄청나서 의식은 절대로 무의식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내’가 한다는 것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지는 기껏해야 ‘나’란, 드러난 의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 마음을 구성하는 세 가지 의식

첫 번째 의식은 정신분석학에서 현재의식이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내가 ‘나’라고 하는 드러난 표면의식인데, 신지학에서는 멘탈체라고 부르고 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는 6식이라는 의식에 해당된다. 호오포노포노에서는 ‘우하네’라 부르고 일반적으로는 에고(ego)다.

두 번째 의식은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이라 부른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숨어있는 심층의식이다. 신지학에서는 아스트랄체, 불교 유식학에서는 7식에 해당되는 ‘말라식’, 호오포노포노에서는 ‘우니히필리’라 한다. 영혼의 ‘혼(魂)’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체적으로 7식은 ‘경험한 총체’를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현재 의식과 잠재의식을 아우르는 실질의 ‘에고적인 나’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의식은 정신분석학에서는 초의식, 신지학에서는 코잘체, 불교 유식학에서는 8식에 해당되는 ‘아뢰야식’, 호오포노포노에서는 ‘아우마쿠아’, ‘슈퍼 에고’라고도 이르는 ‘영(靈)’이 해당한다.

이 셋을 통칭하여 광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 객체와 주체

이 마음 안에는 물질을 포함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마음이 있다. 이것을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전5식(前五識)이라고 부른다. 이를 나누면 1식인 안식이 있고, 2식인 이식, 3식인 비식, 4식인 설식, 5식인 신식이 있다.

이것이 오감을 이루고 이것을 통괄하는 것이 6식인 의식이란 현재의식이다. 조금 복잡하지만 이 전5식과 6식에 7식을 더한 것을 객체라 할 수 있고, 거기에 아뢰야식까지 합친 것을 일컬어 ‘하나의 사람’이라고도 한다.

‘객체’인 사람은 궁극적인 문제이고 또 궁극적인 답이다. 사람이란 객체이며 주체인 ‘나’가 끊임없이 다양한 문제와 답을 만들어가며 개개마다 서로 다른 우주의 온갖 스토리텔링을 구사한다. 어찌 보면 이것이 종교라는 틀에서 말하는 원죄이며, 업장이기도 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꾸로 이 자체가 바로 한없이 분화하는 모든 것을 푸는 열쇠가 된다. ‘의식과 무의식, 어떻게 다룰 것인가’하는 주체와 관찰자가 ‘나’라고 하는 객체인 것이다. 문제와 해답은 그 객체가 되는 분리의식, 곧 분리감(分離感)을 극복하는데 있다.

이 때 중요한 작용을 하면서 주체인 것이 곧 현재의식과 무의식이다. 이 두 의식이 서로 괴리(乖離)하고 서로 믿지 못한다. 이를 ‘근본무명’이라 하고 죄의식이라고도 하고 결핍감이라고도 한다.

 

▲ 욕망의 원인은 ‘결핍감’

우리가 바라는 욕망(欲望)들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원인이 결핍감이다. 이것은 무엇이든 한정돼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도 증명하고 있듯이 지금의 우주는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 우리의 욕심과 원이 그만큼 우주를 팽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의식과 시공간은 한정이 없다. 이러한 바탕이 되어 있는 데서 우리의 표면의식과 무의식을 작동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현재의식과 무의식을 일치하게 유도하여 동화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현실의 실생활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선 물리적으로도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나 양심이라고 하는 바로미터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잡념이 줄어들고 마음이 떳떳해진다. 그래야 현재의식과 무의식이 합의를 보기가 쉬워진다.

마음이 떳떳해지면 기도 발이 잘 듣는다. 자기나 남의 말을 잘 수긍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하’라고 감탄이 되어야 속마음과 겉 마음이 같아지고 그 때에야 일들이 성사가 된다. 최면과 자기암시 등 각종 종교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밀을 밝히자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개개인의 사정과 작금의 일들은 좋든 나쁘든 우리 개개인의 표면의식과 무의식의 합작품이다. 이 일들은 절대로 두 의식이 합의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무지한 현재의식이 납득을 하지 못한 것뿐이다. 자기의 두 의식의 결과물인데 현재의식이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남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의 문제는 남 탓이 아니고 오로지 자기 탓이 되고 자기 덕이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수많은 ‘나’들이 합의한 결과인 것이다. 지금의 처지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러니 그 의식들의 위대함에 감사해야 한다.

최락완 교수(사우스베일로 한의대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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